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프리미어, PDF. 이 단어들이 낯설지 않다면, 그 중심에는 어도비(Adobe)가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 제작 환경을 선도해온 이 기업의 출발은 놀랍도록 조용하고 실용적인 문제 해결에서 시작됐습니다. 존 워녹과 찰스 게스케, 두 명의 컴퓨터 과학자는 인쇄 기술의 비효율을 해결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회사를 세웠고, 그 결정은 오늘날 전 세계 창작의 방식을 바꿔놓게 됩니다.
레이저 프린터 시대의 도전, 포스트스크립트
1980년대 초, 존 워녹과 찰스 게스케는 제록스(Xerox)의 팔로알토연구소(PARC)에서 함께 근무하며 그래픽 기술과 인쇄 방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프린터는 복잡한 문서나 그래픽을 제대로 출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기업에서는 ‘디지털 문서의 시각적 정확성’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사람은 새로운 페이지 기술을 고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입니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 언어는 프린터와 컴퓨터 간 소통의 혁신을 가져왔고, 고해상도 출력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러나 제록스 내부의 무관심 속에 그들은 기술의 상용화를 위해 독립적인 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982년, 어도비의 탄생
1982년,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 로스앨토스의 작은 차고에서 ‘어도비 시스템즈(Adobe Systems)’를 창업합니다. 회사 이름은 워녹 집 근처를 흐르던 ‘Adobe Creek’에서 따왔고, 이는 단순함과 지역적 정체성을 동시에 상징했습니다.
초기의 어도비는 포스트스크립트를 개발하고 이를 상용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던 중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이 기술에 주목하게 됩니다. 잡스는 포스트스크립트가 매킨토시와 함께 고급 프린팅 시장을 혁신할 수 있다고 보고, 어도비에 투자하고 기술 라이선스를 제안합니다. 이 파트너십은 어도비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고, ‘레이저라이터’ 프린터의 성공은 DTP(데스크탑 퍼블리싱) 시대를 열게 됩니다.
포토샵과 크리에이티브 제품군의 확장
1990년대, 어도비는 데스크탑 퍼블리싱을 넘어 창작 소프트웨어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이 시기 ‘포토샵(Photoshop)’의 인수가 결정적인 변곡점이 됩니다. 존 놀(Thomas Knoll) 형제가 개발한 이 프로그램을 어도비가 정식 제품으로 출시하면서, 디지털 이미지 편집의 표준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일러스트레이터, 프리미어, 애프터이펙트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 출시로 어도비는 영상·디자인·출판 산업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단순한 출력용 프로그램을 넘어, 어도비는 ‘디지털 콘텐츠 제작 생태계’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PDF의 발명과 문서 혁신
1993년, 어도비는 또 다른 혁신 ‘PDF(Portable Document Format)’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플랫폼이나 운영체제와 무관하게 문서의 서식과 레이아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유할 수 있는 포맷이 필요했고, PDF는 그 해답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용자가 많지 않았지만, 전자 문서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PDF는 점차 정부·기업·교육기관의 표준 문서 형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문서 보관, 공유, 인쇄에 있어 PDF는 가장 신뢰받는 포맷입니다.
클라우드 시대의 전환과 지속적인 혁신
2012년, 어도비는 기존의 패키지 소프트웨어 판매 방식을 버리고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Creative Cloud)’로 전면 전환합니다. 이는 정기 구독 방식의 SaaS 모델로, 사용자들은 최신 버전을 항상 사용할 수 있으며, 클라우드 기반 협업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전환은 사용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수익성과 접근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됩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기반 생성툴 ‘파이어플라이(Firefly)’와의 연동을 통해 생성형 AI 시대에 대응하고 있으며, 문서 서명 서비스 어도비 사인(Adobe Sign)과 같은 B2B 솔루션도 강화 중입니다.
마무리
어도비는 복잡한 기술보다 실질적인 사용자 경험을 먼저 생각한 회사입니다. 인쇄 문제에서 출발해 디자인, 영상, 문서 관리까지 전방위로 확장한 이 기업은, 단순한 소프트웨어 업체가 아닌 ‘디지털 창작 인프라 기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창업자 존 워녹과 찰스 게스케의 실용적인 문제의식과 창의성에 대한 존중은, 지금도 어도비의 DNA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창작을 시작하는 수많은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에게, 어도비는 도구이자 무대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인쇄 품질을 고민하던 두 명의 과학자가 만든 조용한 반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