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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 창업 스토리 완벽 정리 (장병희 & 최기호, 기업역사, 요약)

by smartinfo100 2025.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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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 사진

영풍은 국내 산업 기반을 지탱해온 대표적인 비철금속 전문 기업으로, 1955년 장병희와 최기호 두 창업자의 실용적 판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금속 유통으로 출발했지만, 이후 제련과 전자소재 분야까지 사업을 넓히며 대한민국 소재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기업의 성장은 조용하지만 뚜렷했고, 창업자들의 철저한 실행력은 오늘날까지도 조직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을지로에서 시작된 금속 유통업

1955년, 장병희와 최기호는 서울 을지로에 ‘풍산상사’를 설립하고 금속 원자재 유통업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이후 복구가 한창이던 시기에, 산업 현장은 안정적인 금속 공급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창업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고, 구리와 아연을 중심으로 제조업체에 금속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구조를 빠르게 갖췄습니다.

유통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중개를 넘어서, 언젠가는 생산까지 직접 수행해야 한다는 판단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영풍산업’ 설립의 기반이 되었으며, 유통에서 제조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전환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제조 기반 확립과 영풍산업 설립

1961년, 풍산상사로부터 분리된 ‘영풍산업’이 설립되면서 제조업 진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제련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술 도입과 현지화가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창업자들은 해외 기술진과 협력하면서 동시에 국내 인력 양성에도 집중했습니다. 이를 통해 아연, 납 등의 금속 가공 능력을 점차 확보했고, 생산 공정을 자체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제조업 진출은 사업적으로도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특히 원재료 수입에 의존하던 국내 시장에서 국산 비철금속 제품은 환영받았고, 영풍은 수입 대체 효과를 현실화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석포제련소의 건설과 생산 확대

1974년, 강원도 봉화군 석포면에 ‘석포제련소’가 완공되면서 영풍의 생산 역량은 또 한 번 도약하게 됩니다. 이 시설은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 제련소였으며, 아연 제련을 통해 대량 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련 기술은 외국 기술에 의존했지만, 내부 연구를 통해 점차 국산화를 이뤄냈고, 공정 효율 역시 꾸준히 개선되었습니다.

석포제련소는 이후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서 재활용 기반 생산 시스템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공정 내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다시 회수하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장치들이 지속적으로 적용되며, 영풍의 ESG 경영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자소재와 반도체 산업으로의 확장

1990년대 이후, 영풍은 전자소재 및 반도체 관련 부품 분야로 사업을 넓혔습니다. 자회사 ‘코리아써키트’와 ‘인터플렉스’를 통해 인쇄회로기판과 고기능성 FPCB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등 국내 주요 IT 기업에 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했습니다.

동시에 고순도 금속소재 가공 역량도 향상시켰습니다. 인듐, 갈륨 등 희소금속을 정밀 가공할 수 있는 설비와 인력을 갖추면서,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패키징 시장 내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풍은 소재 산업의 전후방을 모두 아우르는 구조를 구축해나갔습니다.


마무리

영풍은 빠르게 성장하거나 화려한 기술을 앞세운 기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장병희, 최기호 두 창업자가 내린 결단과 실행은 산업 기반이 부실하던 시절에 무게감 있는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이 유통에서 시작해 제조로 나아갔고, 이후 고기능 전자소재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장의 필요를 정확히 읽는 통찰과 리스크를 감내하는 추진력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영풍은 여전히 금속 정련과 소재 개발에 집중하며 조용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명확한 대중 브랜드는 아니지만, 수많은 기술의 근간을 지탱하는 기업으로서 오늘날 산업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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