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운동화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이름, 나이키. "Just Do It"이라는 단순한 구호 아래 나이키는 스포츠 브랜드를 넘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이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작은 1960년대, 한 청년의 아이디어와 한 코치의 실험정신에서 출발했습니다. 러닝화를 트렁크에 싣고 학교 운동장을 누비던 날들이, 어떻게 글로벌 기업의 첫 장면이 되었는지, 그 창업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1964년, 미국 오리건 출신의 육상선수 필 나이트는 스탠퍼드 MBA 과제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합니다. ‘일본에서 제조한 고품질 러닝화를 미국 시장에 도입하면, 독일 브랜드가 지배하던 스포츠화 시장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그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오니츠카 타이거(현 아식스) 본사를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미국 내 독점 판매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귀국 후, 그는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작은 회사를 설립합니다. 첫 파트너는 그의 대학교 시절 육상 코치였던 빌 바우어만. 바우어만은 신발을 해부하고 개조하던 실험적인 코치였고, 그의 조언은 제품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 필 나이트는 자동차 트렁크에 신발 상자를 실은 채, 대학 운동장마다 직접 찾아가 주문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니츠카 측과의 관계는 점점 불편해집니다. 필 나이트는 더 이상 누군가의 제품을 파는 데 만족하지 않았고, 자체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1971년, 그는 ‘나이키(Nike)’라는 새로운 이름을 등록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이었죠.
로고도 함께 준비됐습니다. 대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이 디자인한 곡선 하나, ‘스우시(Swoosh)’는 단돈 35달러에 거래됐고, 오늘날 나이키를 상징하는 영원한 심벌이 됩니다. 같은 해, 바우어만은 와플 기계에서 착안한 밑창을 신발에 적용했고, 이는 이후 ‘와플 트레이너’로 불리는 혁신 제품의 기반이 됩니다.
나이키가 대중적으로 폭발한 시기는 1980년대입니다. 바로 ‘에어 조던’ 시리즈가 세상에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1984년, 당시 신인이었던 마이클 조던과의 계약은 당대에는 모험처럼 여겨졌지만, 결과는 누구도 상상 못 한 대성공이었습니다.
조던이 경기를 지배할 때마다, 나이키는 함께 성장했습니다. 에어 조던은 단순한 운동화를 넘어서 문화 그 자체가 되었고, 스포츠 마케팅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냅니다. 이후 타이거 우즈, 세레나 윌리엄스, 르브론 제임스 등 최고의 선수들과의 파트너십은 나이키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성장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나이키는 저임금 노동과 아동 노동 문제로 전 세계 소비자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규모 불매운동도 이어졌고, 나이키는 기업 윤리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후 나이키는 공급망 투명성 강화, 윤리적 생산 기준 도입, 친환경 소재 확대 등을 추진하며 회복에 나섭니다. 최근에는 러닝 앱, 디지털 피트니스 플랫폼, NFT 스니커즈 및 메타버스 진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나이키는 처음부터 거대한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한 켤레라도 더 팔기 위해 뛰었던 청년의 도전에서 출발한 브랜드였습니다. 트레이닝 코치의 아이디어, 디자이너의 한 줄의 곡선, 그리고 운동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갈망이 함께 어우러져 지금의 나이키가 만들어졌습니다.
승리하는 자를 위한 브랜드, 그리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이들을 위한 브랜드. 나이키의 창업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